거대한 전광판도 그녀에겐 캔버스였다…쿠사마 야요이가 옥외광고 업계에 남긴 유산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 (Yayoi Kusama)가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물방울무늬와 호박, ‘인피니티 미러 룸(Infinity Mirror Rooms)’으로 현대미술에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남긴 그는 회화와 조각을 넘어 패션과 건축, 도시 공간, 옥외광고까지 예술의 무대를 확장한 작가였다.
쿠사마는 2026년 8월 14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쿠사마 야요이 스튜디오 (Yayoi Kusama Studio)는 27일 그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점과 꽃, 그물 등의 환영을 경험했고, 이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언어로 발전시켰다.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쿠사마는 1960년대 전위예술계에서 활동하며 반복과 무한, 자신과 주변 세계의 경계를 지워가는 ‘자기소멸(Self-Obliteration)’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담았다. 이후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인피니티 미러 룸은 관람객이 작품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경험하게 했다. 오늘날 ‘몰입형 예술(Immersive Art)’로 불리는 새로운 예술 경험을 일찍부터 보여준 셈이다.
옥외광고 업계에서 쿠사마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은 예술이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의 물방울무늬와 강렬한 색채는 건물 외벽과 쇼윈도, 초대형 조형물, 디지털 옥외광고(DOOH) 스크린으로 확장되면서 도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으로 바꿔놓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글로벌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Louis Vuitton)과의 협업이다. 2012년 첫 협업에 이어 2023년 두 번째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쿠사마의 물방울무늬는 가방과 의류를 넘어 런던과 뉴욕, 도쿄, 서울 등 세계 주요 도시의 건물과 쇼윈도, 대형 디지털 스크린을 뒤덮었다.
영국 런던에서는 세계적인 옥외광고 랜드마크 피카딜리 라이츠 (Piccadilly Lights)가 쿠사마의 디지털 캔버스로 변했다. 루이비통 트렁크와 쿠사마 특유의 물방울무늬를 활용한 콘텐츠가 초대형 스크린을 채우면서 그의 예술은 미술관의 작품이 아니라 런던 한복판에서 시민과 관광객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도시 경험이 됐다.
그리고 런던의 명품 백화점 해러즈 (Harrods)는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변했다. 루이비통은 해러즈의 유명한 외벽 전체에 프로젝션 매핑을 적용해 쿠사마의 물방울무늬를 펼쳐 보였다. 건물에는 약 15m 높이의 쿠사마 조형물도 설치됐다. 거대한 쿠사마가 직접 건물 외벽에 점을 그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쇼윈도와 건축물, 조형물, 브랜드 광고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해러즈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설치미술 작품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도 파리 시내 주요 루이비통 매장과 쇼윈도에는 쿠사마를 실물처럼 구현한 애니매트로닉 로봇과 그의 상징인 물방울무늬가 등장하며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쇼윈도에 설치된 쿠사마 로봇은 실제 작가가 유리창 너머에서 물방울무늬를 그리고 있는 듯한 움직임을 연출했다. 전통적인 상품 진열 공간이었던 쇼윈도를 하나의 움직이는 설치미술이자 브랜드 미디어로 바꾼 것이다. 현실의 인물과 로봇, 예술 작품과 상업 공간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면서 행인들이 단순히 광고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 작품이 펼쳐지는 도시 공간의 일부가 되도록 했다.
미국 뉴욕에서도 쿠사마의 예술은 거리 위로 나왔다. 타임스스퀘어의 초대형 디지털 전광판에는 물방울무늬 루이비통 트렁크와 쿠사마의 대표적인 호박을 활용한 3D 콘텐츠가 등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광고 경쟁이 벌어지는 타임스스퀘어에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브랜드 광고를 넘어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거대한 공공미술처럼 도시 풍경에 녹아들었다.
대한민국 서울도 이 글로벌 프로젝트의 무대가 됐다. 서울 강남 코엑스 일대의 대형 디지털 전광판에서는 루이비통과 쿠사마의 협업 콘텐츠가 3D 아나모픽 영상으로 구현됐다. 쿠사마 특유의 물방울무늬와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대형 DOOH의 규모와 움직임을 만나면서 일반적인 패션 광고와는 다른 도시 경험을 만들어냈다.
일본 도쿄 신주쿠에서도 물방울무늬로 뒤덮인 루이비통 트렁크가 열리며 쿠사마의 작품 세계가 펼쳐지는 3D 아나모픽 콘텐츠가 선보였다.
같은 예술적 아이디어가 뉴욕과 런던, 도쿄, 서울이라는 서로 다른 도시의 건축과 미디어 환경을 만나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그녀의 루이비통 프로젝트가 옥외광고 업계에 남긴 의미는 유명 예술가와 명품 브랜드의 협업이라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쿠사마의 예술은 도시의 건물과 쇼윈도, 조형물, 대형 전광판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광고를 보여주던 공간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각과 기억을 만들어주는 ‘경험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3D DOOH와 프로젝션 매핑, 초대형 조형물은 쿠사마가 평생 탐구했던 ‘무한’이라는 개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작은 점 하나가 끝없이 반복되며 화면을 채우고, 건물을 뒤덮고, 결국 도시의 풍경까지 확장됐다. 미술관의 벽 안에서는 담기 어려웠던 그의 예술 세계가 오히려 도시라는 거대한 공간을 만나 더욱 강렬해졌다.
옥외광고를 오랫동안 바라봐 저자에게 쿠사마의 작업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좋은 옥외광고는 단순히 큰 화면에 광고를 크게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익숙했던 장소를 잠시 멈춰 바라보게 하고, 그 장소를 이전과 다르게 기억하게 만든다. 쿠사마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그 가능성을 누구보다 인상적으로 보여줬다.
뉴욕 거리에서 런던과 파리의 건물 외벽으로, 다시 서울과 도쿄의 거대한 3D 전광판으로 이어졌던 쿠사마의 수많은 점은 이제 그를 기억하는 하나의 흔적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가 도시 공간에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옥외광고 전광판은 광고를 보여주는 화면에 머물러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도시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하나의 예술 공간이 될 수 있는가?
쿠사마 야요이는 평생 자신의 점을 미술관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결국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2016년 구사마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